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
평범한 월말이었으면 머리 쥐어 싸고 앉아 매출과 매입을 더하고 빼며, 더 잘해야 할 텐데와 난 왜 이럴까를 혼잣말로 반복하고 있을 텐데. 10월 내내 진이 빠진 걸까.. 오늘은 별 감흥이 없다. 집에 가다, 어디 소주라도 한 잔 할까. 분위기 좋은 바라도 가서 몇 잔 들이켜 볼까. 그런 생각으로 시간과 노닥거리고 있다.
2008년 10월. 할 달 내내.
주가는 빨간선과 파란선을 오르락 내리락 거렸고, 날씨는 예년 기온보다 더 높았다 더 낮았다가를 반복했으며, 내가 운영하는 쇼핑몰의 매출 역시, 주가 따라, 날씨 따라, 내 마음 따라, 미친년 널 뛰듯 날 뛰었다. 결국 10월에는, 모두가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전광판의 주가도, 수온계의 온도도, 통장의 잔고도..
요즘 들어. 가끔.
아침에 옷 투정을 한다. 내 옷은 내가 직접 사는 편이라 누구를 탓할 이유도 없는데도, “입을 옷이 없어.”라며 짜증을 부린다. 하긴. 없기는 하다. 옷장을 한참이나 들여다 봐도,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은 위아래 합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세탁이라도 밀려 있으면, 그나마 꼽을 수 있는 손가락이 줄어든다. 누가 옷 사지 말라고 했던가? 옷 구경 하러 갈 시간도, 인터넷 쇼핑몰을 뒤질 기분도, 클릭질 몇 번으로 주문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지.
그러고 보면 시간 참 빠르다.
도매와 공방을 찾아 다니며, 없는 돈으로 쇼핑몰을 만들어 보려고 기를 쓰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1년 전이다. 쇼핑몰을 오픈 하기 위해 1억이 들어 갔고, 1억을 대출 받았다. 그리고 1년 동안 얼마간의 대출을 갚았고, 제품 가짓수도 늘어났으며, 월 매출 역시 많이 늘었다. 직원도 늘어났고, 적자를 면한지는 한참 전이다. 이제 월급도 늘어날 것이며, 사무실 확장 이전도 계획하고 있다. 그렇지만 목표는 저기 저 산 위에 있고, 현실은 매번 진흙탕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발은 더럽혀지고, 어깨는 무거워지고, 몸은 지쳐 버린다. 가끔은 숨 쉬기가 버겁다.
정말이다.
내 꿈은 산사람이었다. 산에서 나무 열매나 따 먹고, 약초를 팔아 밥을 먹고 사는 산 속 무지렁이가 진짜 내 꿈이었다. 간단한 산수와 조그만 지식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내 목표였는데, 어쩌다가 내 인생은 완전히 꼬여, 복식부기와 전자상거래법을 달달 외어야 간신히 생활을 연명할 수 있는 복잡다단한 인생이 되어 버렸다. 그 뿐이냐? 투자와 수성을 위해,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를 늘 살피고 있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기 위해 사회면과 스포츠 면도 살펴야 하고, 경쟁자는 지금 뭐 하는지, 시장 상황은 어떤지 늘 안테나를 켜고 있어야 한다. 사실.. 똥배가 너무 나와 버리는 바람에, 이제는 나무 열매만 먹어서는 살 수가 없게 되긴 하였다. 고기도 먹어야 하고, 맛있는 과일도 먹어야 하며, 신선한 회도 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술이 꼭 필요해 졌어. 아..아.. 산사람이 아닌, 술사람이 될 지 몰라.
내 나이 34.
배는 나오기 시작하고, 어깨는 구부정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내가 디딛고 있는 이 땅에 올바른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런 세상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할 각오를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 가정이 보다 견실해지기를 바라고, 그런 가정을 위해 이 한 몸을 희생해가고 있다. 한 때는 많은 여자들의 남자이길 바라고, 온갖 치장에 운동을 열심히 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뚱뚱해진 몸을 이끌고 내 마누라 한 명이라도 건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아쉽지 않다.
그렇지만 열정이 식어가는 것은 우울하게 만든다. 열심히 살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원하는 그런 곳이 아닐 때 느끼는 무력감이 나를 힘들게 한다. 좋은 직장을 때려 치고 나온 것은, 올라가도 올라가도 계속 미끄러지는, 진흙탕 같은 이런 곳에 서 있기 위해서가 아니었는데... 과거에 대한 끝없는 후회가 미래를 아득하게 만든다. 아득한 미래는 결국 현실을 지치게 한다. 희미해진 목표는 현실의 열정을 앗아가 버린다. 인생이란, 꼭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는 롤플레잉 게임같은 것은 아닐텐데. 나는 왜 이렇게 아둥바둥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애를 쓰는 걸까? 결국 뒤돌아보면, 계단은 채 오르지도 못한 채, 2008년 10월의 주가 마냥, 날씨마냥, 매출 마냥, 그리고 내 마음 마냥, 오르락 내리락 하다 마는 것을.
가끔 일탈을 꿈꾼다.
예쁜 여자와 함께 지중해 위를 요트로 달리는.
혹은 작은 경비행기로 태평양을 홀로 횡단하는.
혹시 아는가. 생떽쥐베리처럼 아무도 모르게 소혹성 B-612(맞나?)로 떠나게 될지..
케케케.. 내가 미쳤나 보다.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
부담없는 금요일인데다가, 비까지 온다. 소주 한잔 하기 더없이 좋은 날이다.
10월의 마지막 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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